외환시장 ‘유동성 착시’ 경고…“다음 금융위기 뇌관 될 수도”
하루 거래 규모만 7조 5,000억 달러에 달하는 글로벌 외환(FX) 시장이 표면적인 유동성과 달리, 구조적인 취약성을 안고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블룸버그는 31일 주요 글로벌 금융기관들의 분석을 인용해 “외환시장이 ‘유동성 착시(liquidity mirage)’ 상태에 빠져 있다”며, 충격이 발생할 경우 파급력이 과거보다 훨씬 클 수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시티그룹, 도이치은행, XTX마켓 등 주요 외환시장 참여자들은 “플랫폼 증가와 전자거래 확대가 외환 유동성을 풍부하게 보이게 하지만, 정작 거래의 깊이는 얕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알고리즘 트레이딩 확산과 은행의 내부 주문처리 비중 증가로 인해 ‘실질적 거래 상대방’이 사라지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시티그룹의 마크 메러디스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외환 유동성은 매우 취약하다”며, 지난해 8월 ‘엔화 쇼크’를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당시 캐리 트레이드 청산으로 엔화가 단숨에 3.4% 급등했고, 나스닥지수는 하루 만에 6.4%나 급락했다. 이 과정에서 매수·매도 스프레드가 급격히 벌어지고, 거래 주문 자체가 사라지는 이례적인 현상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유로-달러 같은 주요 통화조차 체결률이 떨어지고 있고, 거래 플랫폼 난립으로 인해 시장 유동성이 분산되면서 평상시에도 스프레드 비정상, 체결 거부 등의 문제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유로넥스트에 따르면 2024년 1월 기준 현물거래 체결률은 74.5%로 1년 전보다 크게 하락했다.
미국 정치 불확실성과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또한 외환시장의 불안요인으로 부각된다. 소시에테제네랄의 존 에스트라다는 “시장 구조가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지만, 유동성은 확실히 예전만 못하다”고 말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외환시장이 다른 자산군보다 견조하다고 평가했지만, 분석 대상이 주요 통화에 국한돼 있으며, 일본 엔화처럼 팬데믹 이후 ‘유동성 부족 현상’이 증가한 사례도 존재한다고 인정했다.
이 같은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대형 은행들은 오히려 고객들에게 플랫폼보다 직접 거래(voice trading) 를 권장하는 추세다. 도이치은행의 베네딕트 카터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와의 직접 거래가 유동성과 협상력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일부 헤지펀드들은 플랫폼보다 직접 거래에서 더 유리한 조건을 얻었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 뉴욕 연준과 영국 중앙은행도 FX시장 구조 변화에 주목하며, 장외시장의 투명성 강화와 시장 안정장치 마련을 강조하고 있다. 거래량만 보면 견고해 보이는 외환시장이, 실상은 다음 글로벌 금융위기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경고에 시장은 점차 무게를 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