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드오픈리서치: 원화 스테이블코인, 은행 이외의 시장 주도 필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논의가 가속화되면서 주요 대선 공약에도 관련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자금 유출 등에 대비해 원화 기반의 스테이블코인 필요성이 제기되며 정책적 논의도 확산되는 분위기다. 그러나 국내에는 아직 명확한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없어 발행과 활용 모두 뒤처진 상황이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해시드 오픈리서치는 보고서를 통해 “스테이블코인 관련 입법이 늦어진 것은 사실이나 해외 사례를 참고해 전략적 제도 설계를 한다면 오히려 성공적인 모델을 만들 수 있다”라고 진단했다. 단순한 규제 수용이 아닌 제도 설계 방향성을 정립해야 할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보고서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은행 중심 발행 모델’에서 벗어나 민간 주체가 참여하는 ‘자본시장 기반 모델’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은행 중심 모델은 고객 예치금을 일대일로 대응해 은행 내부 시스템에서 디지털화하는 구조로 기존 금융 시스템을 그대로 디지털자산 영역에 옮겨온 형태다. 정책 수용성은 높지만 디지털 화폐의 핵심 가치인 확장성·분산성·투명성 등의 측면에서 명백한 제약이 있다. 또 민간 기업·디지털자산 플랫폼·해외 블록체인 인프라와의 연동도 제한적이라는 평가다.
유럽연합과 일본은 이러한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두 지역 모두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이미 마련했지만 실제 발행 수나 실사용은 저조한 수준이다. 일본은 은행에만 발행을 허용하고 있고 유럽은 민간 발행을 허용하되 기준이 매우 까다롭다.
해시드 오픈리서치는 보고서에서 “이 같은 현상은 단순히 시장의 보수성이나 정책 시행 초기 때문만은 아니다”라며 “제도적 리스크 회피와 안정성에 치우친 은행 중심 구조가 민간의 자발적 참여를 가로막았다”고 분석했다.
반면 미국이 준비 중인 스테이블코인 규제안은 비은행 기관의 발행을 허용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규제 프레임워크는 향후 세계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주도하는 △테더의 USDT △서클의 USDC △페이팔의 PYUSD 등도 모두 민간 기업이 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자본시장 기반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모델은 개별 기업이 은행·비은행 금융기관과 연계해 준비자산을 관리하고 시장 수요에 따라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
해시드 오픈리서치는 △은행 △커스터디 업체 △기술 사업자 등 참여 주체 간 기능을 분담하는 협력 구조를 제안했다. 예를 들어 시중은행 A가 원화 예금 100억 원을 신탁하고, 핀테크 기업 B는 블록체인 발행 시스템을 운영하며, 커스터디 업체 C가 스마트컨트랙트 키 관리를 담당하는 식이다. 이처럼 역할을 분담하면 전문성을 살리면서 위험 요소도 분산할 수 있다.
다만 스테이블코인 발행 전례가 없는 국내 산업 인프라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그러나 주요 금융지주들은 은행·증권·자산운용사 등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어 내부적으로 기능 분리가 가능하다. 여기에 빅테크 기반 결제 사업자가 참여하면 실사용 기반 유통도 활성화될 수 있다. 커스터디 분야 역시 국내 업체들이 일부 역량을 갖추고 있어 참여 가능성이 열려 있다.
문제는 제도다. 현재 국내에서 가상자산 사업자(VASP) 등록을 할 경우 벤처기업 인증이 일괄적으로 취소되고 있다. 당초 금융당국은 거래·매매 등에 한해 제한한다고 밝혔지만 실무에서는 모든 가상자산 사업자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실정이다. 금융당국이 디지털자산 사업 전체를 일률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채상미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디지털자산 사업자를 기능 중심으로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디지털자산 사업자를 △거래중개형 △보관수탁형 △운용관리형 △정보자문형 등 4대 유형으로 분류해야 한다”며 “자산운용처럼 금융소비자 보호가 필요한 행위와 개발 등 기술·정보 중심의 행위를 구분해 제도를 재구조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업자 유형이 다양해질수록 공시·회계·과세 체계도 함께 정비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명확한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정수현 a41 프로덕트 매니저는 “주요국들은 기술 발전과 제도 설계를 병행해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선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며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매니저는 “스테이블코인은 제도와 기술이 동시에 발전해야 가능한 영역”이라며 “규제가 없기 때문에 도입을 미루기보다는 실사용 기반을 먼저 형성해 규제 정립을 유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한국도 디지털자산기본법 2단계 입법 과정에서 스테이블코인 관련 조항을 포함할 예정이다. 현재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기획재정부 등 주요 기관이 관련 논의에 참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