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연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단기 국고채 없이 안정성 어렵다”

국내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단기 국고채 발행이 제도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안정적인 준비자산 확보가 제한되면 스테이블코인의 유동성과 가치 안정성, 나아가 통화 주권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다.
김필규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11일 ‘스테이블코인과 단기 국고채’ 세미나에서 “스테이블코인은 언제든 환매에 대응하기 위해 안전하고 유동성이 높은 준비자산이 필수”라며 “미국·유럽은 단기 국채를 법으로 의무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테더(USDT)·써클(USDC) 등 글로벌 주요 스테이블코인도 대부분을 단기 국채나 관련 금융상품으로 운용한다.
그는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은 가치와 신뢰를 지탱하는 핵심 기반으로 정해진 환율(페그)을 유지하고 환매 요청이 들어왔을 때 안정적으로 지급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며 “이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률에서는 단기 국채처럼 안전하고 현금화가 빠른 자산을 반드시 준비자산으로 보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테더(USDT)와 써클(USDC) 등 대표적인 스테이블코인도 준비자산의 대부분을 단기 국채나 단기 국채에 투자하는 금융상품으로 운용하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는 단기 국고채가 핵심 준비자산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제도적 제약으로 발행이 쉽지 않다. 국가재정법상 국채 발행 시 총발행액 기준으로 국회 승인을 받아야 해 단기 국고채 발행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기 국채 활용이 제한될 경우 스테이블코인이 도입되더라도 사업자들은 은행 예금 등 한정적인 자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예금 운용만으로는 이자 수익이 낮아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대안으로 재정증권, 통화안정증권 등을 검토할 수 있지만 모두 유동성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재정증권은 정부 재정의 수입과 지출 시차를 맞추기 위해 발행되지만, 같은 해 안에 전액을 상환해야 하는 구조여서 발행 시기를 자유롭게 조정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상시적인 환매 대응이 필요한 스테이블코인 준비자산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통화안정증권 역시 발행 규모가 줄고 장기물 비중이 늘어나면서 3개월 이내 만기가 도래하는 물량이 감소했다. 발행 직후에는 거래가 활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래가 급격히 줄어드는 ‘온더런’ 현상으로 인해, 발행된 지 오래된 증권을 보유하면 시장에서 제때 매도하기 어려워 유동성 확보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김 위원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기 국고채’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단기 국고채는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으로 활용되는 것은 물론, 일시적인 정부 재정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고 조달 비용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며 “나아가 단기 금융시장을 활성화하고, 단기물부터 장기물까지 다양한 만기의 금리가 형성되는 ‘수익률 곡선’을 보다 완성도 있게 만들어 시장의 가격 신호 기능을 강화하는 등 여러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국가재정법 개정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법은 정부가 국채를 발행할 때 해당 연도의 총발행 한도액을 국회가 승인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시장 상황에 맞춰 수시로 발행·상환해야 하는 단기물 운용이 쉽지 않다.
김 위원은 “이 규정은 본래 국가 채무 증가를 억제하고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장기물 중심의 발행 관행이 굳어지면서 해외에서 일반적으로 운영되는 3개월·6개월 등 초단기물 공급 체계가 정착하지 못했다”며 “그 결과 한국은 채권시장이 발달한 국가 중에서도 평균 만기가 가장 긴 나라 중 하나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 현재 국내에서 단기 국고채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만기가 3개월 이내로 줄어든 ‘경과물’뿐이다. 경과물은 원래 만기가 더 길었던 국고채가 발행 후 시간이 지나 만기가 짧아진 채권을 뜻한다. 단기 국고채이지만 정부가 발행 시기나 규모를 조절할 수 없고 이미 시장에 풀린 물량에만 의존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특히 발행된 지 오래된 채권은 거래가 거의 없어 유동성이 떨어진다. 전체 국고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약 2%에 불과해 환매 요구가 몰릴 경우 즉시 현금화가 어렵다.
김 위원은 “실질적인 단기 국고채 운용을 위해 국가재정법상 발행 기준을 현재처럼 연간 발행 총액이 아니라, 만기 상환 후 남아 있는 국채 잔액으로 변경할 필요가 있다”며 “이렇게 하면 단기물 발행과 상환을 수시로 조정할 수 있어 유동성 확보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제도 변경이 어렵더라도 현행 규정 안에서 발행 만기를 단축하는 방식만으로도 단기 국채 도입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울러 “단기 국채를 한꺼번에 대규모로 발행하면 기존 채권 수급에 부담을 주고 금리가 급등하는 등 시장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며 “이를 최소화하려면 우선 1년 만기 채권을 할인 발행 방식으로 도입해 수요와 유통 구조를 안정시킨 뒤, 시장이 이를 소화할 여력이 생기면 6개월·3개월 만기 채권으로 점차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