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자산의 내재가치 논쟁, 금융위의 보수적 태도와 산업 성장 기회

이억원 금융위원장 후보자가 “디지털자산(가상자산)은 내재적 가치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다시 밝혔다. 그러나 해외 주요국들이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와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 승인, 연금 투자 허용을 빠르게 진행하는 동안, 한국만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투자자와 산업 모두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일 업계에 따르면 이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 서면질의에서 디지털자산의 화폐 및 금융상품 해당 여부에 대해 “디지털자산은 가격 변동성이 크며 가치 저장이나 교환 수단으로서 화폐의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 발언은 금융당국이 줄곧 유지해온 인식을 재확인한 것이다. 앞서 고승범, 김주현 전 위원장 모두 “디지털자산은 본질적 가치가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시장은 반대로 발행량 제한에 따른 희소성, 탈중앙성, 높은 글로벌 유동성을 새로운 가치 기반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고승범 전 금융위원장은 “디지털자산은 본질적 가치가 없다”고 못 박았고, 김주현 전 위원장도 “투자자 보호가 우선이며 내재적 가치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이 후보자의 발언은 금융위가 전통적 인식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시장에서는 희소성, 탈중앙성, 글로벌 유동성을 새로운 가치의 기반으로 봐야 한다는 반론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비트코인은 발행량이 2100만개로 제한돼 희소성이 보장된다. 네트워크 합의로 운영되는 탈중앙성은 기존 금융시스템과 차별화된다. 글로벌 거래소에서 활발히 거래되는 높은 유동성도 중요한 요소다.
디지털자산 업계 관계자는 “비트코인 가격이 커졌지만 금융당국은 여전히 ‘내재 가치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며 “투자자 기회비용과 해외로 빠져나간 산업 공백은 국내 시장의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해외는 제도화를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은 비트코인 현물 ETF를 승인하고 최근 퇴직연금 투자도 허용했다. 유럽은 미카(MiCA) 규제를 통해 스테이블코인 및 디지털자산 전반을 포괄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일본도 지급결제법 개정으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했다.
미국은 연금계좌에 디지털자산 투자를 명시적으로 허용했다. 이는 디지털자산을 고위험 투자상품이 아니라 장기적 자산운용의 한 축으로 인정한 조치다. 반면 이 후보자는 연금·퇴직계좌의 디지털자산 투자 허용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해외와의 간극이 커지는 상황에서 금융당국도 부정적인 태도만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게 업계의 입장이다. 투자자 보호와 산업 성장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 차기 금융위원장의 과제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의 제도 불확실성으로 신규 서비스 출시가 어렵다”며 “국내 프로젝트들이 해외에 법인을 세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는 연금 편입과 스테이블코인 법제화로 제도권 자금이 유입되지만, 한국만 규제 공백 상태를 계속한다면 투자자 역차별 및 기업들의 경쟁력 상실로 직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후보자는 금변화하는 환경에 금융위도 대응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금융위는 글로벌 금융위기, 서민금융, 핀테크, 디지털자산 등 다양한 환경에 대응해왔다”며 “위원장으로 임명되면 금융산업 혁신, 금융시장 안정,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 금융소비자 보호를 균형 있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이 디지털자산 관련 규율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금융위도 관련 법안을 국회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