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실행 속도에 따른 그림자①] 금융위 해체 가능성…디지털 자산 논의 후순위로 밀려 우려

금융위원회가 17년 만에 해체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디지털자산 법안 추진의 불확실성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스테이블코인 법안과 디지털자산 기본법을 추진해왔지만, 금융정책 기능이 재정경제부로 이관될 경우 정책 주도권이 바뀌거나 일정이 지연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제도화 자체는 이어지더라도 기관 개편 과정에서 투자 활성화 논의가 뒤로 밀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정부·여당·대통령실은 고위당정협의회를 열고 정부조직 개편안을 내놨다. 개편안에 따르면 금융위의 금융정책 기능은 재정경제부로 이관되고 금융감독 기능은 신설되는 금융감독위원회가 맡는다. 금융감독원은 존치되지만 기존 금융소비자보호처는 독립기관인 금융소비자보호원으로 격상된다. 정부는 정책과 감독을 분리해 견제와 책임성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다만 이번 개편은 확정이 아니라 국회 논의를 앞둔 단계이며, 향후 처리 과정에서 변동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감독기구가 늘어나면서 금융회사가 이중 규제를 받을 수 있고, 정책 집행 속도도 늦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새로운 감독기구들이 예산과 인사에서 재정경제부의 영향을 받게 되면 독립성이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디지털자산 업계 관계자는 “정책과 감독을 분리하는 취지 자체는 이해하지만 감독기관이 여러 곳으로 나뉘면 금융사 입장에서는 어느 기관 기준을 따라야 할지 혼란이 생긴다”며 “특히 디지털자산 관련 제도화 과정에서 이중 규제가 현실화되면 시장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효봉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디지털자산 법안도 정책 사안인 만큼 재정경제부가 담당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며 “조직 개편 초기에는 일정한 혼선이 불가피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리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법안 주도권이 재정경제부로 넘어갈 가능성이 커진 가운데 정책 기조가 투자 활성화보다는 규제와 안정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억원 금융감독위원장 후보자의 신중한 태도도 이를 보여준다. 그는 청문회에서 “디지털자산이 존재론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격 변동성이 큰 만큼 금융상품으로 보기 어렵다”며 연금·퇴직계좌 투자 대상으로도 부적합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존재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금융상품으로서의 활용 가능성에는 선을 그은 셈이다.
이러한 입장은 후보 시절 디지털자산의 제도권 편입과 투자자산화를 강조했던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과는 결이 다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도입,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정책, 디지털자산 기본법 제정, 대통령 직속 디지털자산위원회 신설 등을 약속하며 시장 활성화와 산업 육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이 후보자의 발언은 투자상품으로서의 편입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드러내면서, 제도화 논의가 속도를 내더라도 정작 투자 활성화는 후순위로 밀릴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VC 업계 관계자는 “대통령 공약과 당국 후보자의 시각이 엇갈리면 정책 일관성이 흔들리게 된다”며 “특히 글로벌 자본은 규제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으면 투자 대상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어, 산업 전반의 경쟁력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정책 불확실성이 발목을 잡고 있는 한국과 달리 해외 주요국은 규제를 명확히 하면서 동시에 투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안드레센 호로위츠(A16Z)와 같은 디지털자산 전문 벤처캐피탈이 수십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관련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지난 2022년에는 45억달러(약 6조원)를 모아 누적 76억달러(약 10조원) 규모의 대형 펀드로 성장했다.
특히 지난해 한 해에만 전 세계적으로 약 137억달러(약 19조원)가 디지털자산 분야에 투자됐고, 올해에는 180억달러(약 25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등 VC의 투자 열기는 미국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 역시 금융청(FSA)을 중심으로 제도권 편입을 추진하고 있다. 2023년 세계 최초로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체계를 도입해 엔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했으며, 2025년 첫 승인을 앞두고 있다. 이미 SBI홀딩스 산하 거래소가 취급 허가를 받았고, 미쓰이 스미토모 등 대형 은행들도 달러·엔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위한 컨소시엄을 결성했다. 일본 정부는 암호자산을 금융상품으로 재분류하고 과세 체계를 주식과 동일하게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하며, 이를 통해 기관투자자 유입과 벤처투자 활성화를 동시에 꾀하고 있다.
국내 전문가들은 이러한 격차가 장기적으로 자본과 인재의 해외 유출을 가속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박혜진 서강대 교수는 “국내 VC들이 명확한 제도적 틀이 없는 상황에서 투자를 꺼리는 사이, 유망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며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이 마련돼야 글로벌 자본도 한국 시장에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